창대공 행장(昌臺行狀)

지은이: 정만양(鄭萬陽)

1664년(현종 5)∼1730년(영조 6). 조선 후기의 학자.

경상북도 영천 출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경순(景醇), 호는 훈수(塤叟)·기암(企菴)·정재(定齋). 아버지는 생원 석주(碩胄)이며,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방렬(邦烈)의 딸이다. 종조부 시연(時衍)과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동생 규양(葵陽)과 함께 수학하였다.  출처: 정만양 [鄭萬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행장(行狀)이란

행장은 죽은 사람의 문생이나 친구, 옛날 동료, 아니면 그 아들이 죽은 사람의 세계()·성명·자호·관향()·관작()·생졸연월·자손록 및 평생의 언행 등을 서술하여 후일 사관()들이 역사를 편찬하는 사료 또는 죽은 사람의 명문()·만장·비지·전기 등을 제작하는 데에 자료로 제공하는데 사용된다.  출처: 행장 [行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

영천(永川)은 이미 수복되었고 안동(安東) 이상의 적은 모두 물러나 상주(尙州)에 주둔하였고, 그 나머지의 무리는 흩어지고 낙오된 자가 아직도 비안(比安)과 용궁(龍宮) 사이의 경계에 응거하였다. 공은 가볍고 예리한 군사를 선발하여 인솔하고 진군하여 격파하여 살상한 바가 또한 매우 많으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八월에 정리하여 배치된 모든 군사들이 월성(月城)의 전투로 달려갔다. 잠시 후에 박진(朴晋)의 병사가 군율(軍律)을 실추하고 싸움에 패하였다. 의병도 힘이 약하여 능히 대적할 수가 없자, 최인제(崔仁濟)와 정석남(鄭碩男) 등 十七인이 모두 전사하였다. 공은 조성(曺珹)과 박언국(朴彦國) 등과 더불어 병사를 거두어 조금 후퇴하여 진천뢰포(震天雷砲)로써 어지럽게 적진 가운데 무차별 침입하니 적이 놀래고 두려워서 밤에 서생포(西生浦)로 도망하였다.

당시에 비안(比安)은 현감이 없었는데, 도신(道臣:觀察使)이 장계(狀啓)를 올려 공을 임시로 비안현(比安縣)의 업무를 보도록 요청하였다. 비안현(比安縣)은 적과 충돌하는 노변(路邊)에 있어서 병란(兵亂)의 피해가 더욱 혹심하여 공적, 사적 모든 것이 사라져 두서(頭緖)가 없었다. 공은 성심을 다하여 자세하게 복구 계획을 세웠으니 고을의 선비들과 백성들은 공을 의지하였으며 성은 점차 생업을 되찾았다.

계사(癸巳):一五九三)년 여름에 공은 전봉(前鋒)의 돌격장(突擊將)으로써 곧장 울산(蔚山)으로 달려가 태화(太和)의 나루에서 전투하여 하루종일 싸움 끝에 상당수의 적을 죽였다. 공도 몸에 수십여 곳의 상처를 입었으나 독전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적도 역시 기세가 두려워서 물러갔다. 도신(道臣)이 장계(狀啓)를 올려 이르기를 『비안현감(比安縣監)인 정대임(鄭大任)은 사람됨이 대단히 용감하고 담력과 용맹이 있으며 왜란이 일어난 때부터 의리로서 분연히 일어나 적을 토벌하였으니, 영양(永陽:永川)의 대첩과 용궁(龍宮)의 돌격과 비안(比安)의 유격전(遊擊戰)에서 그가 목을 베어 죽임과 사살하였음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고, 지금 태화진(太和津)의 싸움에서도 역시 돌격장(突擊將)으로써 적을 치매 화살과 탄환에 갑옷이 부셔졌는데도 오히려 후퇴하거나 피하지 않았으니 신하로서 이 사람의 충성과 의리 그리고 공로는 한 도(道)의 최고에 있을 뿐만 아니라 타도(他道)에서도 그러한 경우가 드물 것입니다. 오직 부장(部將)으로 다시 특별한 보상이 없으니 그 품계를 더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사기도 없어지니 빨리 높은 상을 내리어 군사들을 격려하소서.』라고 하였더니, 이 해의 가을에 중훈대부(中訓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예천군수(醴泉郡守)가 되셨다.

몇 년 동안의 싸움 중에 전염병이 돌고 온 고을에 떠돌아 굶는 거지들이 발생하니 사방에 먹여 다스릴 대상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 공은 한편으로는 군사들의 군량을 공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휼 행정을 폄에 있어 낮에는 말을 타고 고을을 돌아보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못하니 마음을 다함이라. 온 힘을 다하여도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공은 이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번(李蕃) 등이 그각 식사는 적고 사무가 번거러움을 염려하자 공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스스로 순국한들 무슨 수고로움이 있으랴!』라고 하셨다.

겨울에 경상좌도(慶尙左道) 병마우후(兵馬虞候)에 제수되시어 공은 군졸들을 위로하고 병사들을 훈련하는 일에 빠트리는 바가 없으니, 관찰사(觀察使)이신 한효순(韓孝純)이 칭찬하며 말씀하시기를 『인재로다, 인재로다!』라고 하셨다.

갑오(甲午:一五九四)년 봄에 무과에 급제하셨다. 때에 관군과 함께 왜적을 조령까지 추격하였으니, 적들은 후퇴하여 당교(唐橋)를 점거하였으며 군중 또한 만 여명이었다. 한효순(韓孝純)공이 습격을 동모하고자 하기에, 공은 중지하며 말씀하시기를 『당교(當橋)는 강에 다달아 장애가 많으므로 가볍게 침범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군사로써 중요한 길목에서 적의 완래하는 세력을 끊는다면 적은 능히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과연 적들은 밤을 틈타서 몰래 도망하였다.

공은 오랫동안 전쟁으로 과로한 것이 병이 되어 들것에 실려 향리로 돌아오자, 이번(李蕃) 등이 들어가서 살폈더니 기운이 쇠약하여 능히 말씀은 못하였으나 입속에서 중얼거리는[잠꼬대] 말슴이 모두가 적을 토벌하여 나라에 보답하여야 한다며 六월 八일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향년은 四十二세이셨다.

호수공(湖叟公)이 소문을 듣고 안타깝게 여기며 달려가서 통곡하며 몸소 스스로 염습(殮襲)을 하였고, 빈소와 시신 모실 차비를 하였다. 이 해의 이 달 모일(某日)을 이용하여 삼귀동(三龜洞) 오향지원(午向之原:子坐)에 장례를 치루었으니, 선고(先考)의 묘소로 따라간 것이었으며 원근에서 소문을 들은 자가 서로 조문(吊問)하지 않음이 없었고 지금에 이르도록 논의를 숭상하는 사림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비분강개(悲憤慷慨)하니 두보의 옛 글이 떠오른다. 『전쟁에 나아가매 싸움에 이기지 못한채 몸이 먼저 가니 두고 두고 영웅으로 하여금 눈물만 옷깃에 적시게 하구나.』라고 하였던 것이 이렇게 죽은 이가 제갈량(諸葛亮) 한 사람 뿐이리오.

공은 병세가 위급할 대 정녕(鄭寧)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전후의 일기(日記)를 가지고 오너라. 나는 후일에 혹시 요행하게 상을 바라는 자들의 핑계꺼리가 될까 두렵도다.』라고 하시고는 드디어 불태워 버렸다. 도신(道臣:觀察使)도 또한 놀라고 애통함을 스스로 견디지 못하여 곧장 장계(狀啓)를 달려서 올렸더니, 소경왕(昭敬王:宣祖)께서 그의 충성과 근검함을 어여삐 여기시어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와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추증하셨고, 그 후 기유(己酉:一六O六)년 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와 호조참판(戶曺參判) 겸 의금부(義禁府)의 동지사(同知事)도 더하여 추증되었다.

정부인(貞夫人)은 계림김씨(鷄林金氏;慶州金氏)이시니, 참봉(參奉)인 건(乾)의 따님이시며, 가정(嘉靖) 정미(丁未:一五四七)년에 태어나시어 숭정(崇禎) 병자(丙子:一六三六)년에 돌아가셨으며, 묘소는 신령(新寧) 별곡(別谷)에 있다. 三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양필(良弼)인데 주부(主簿)요, 차남은 양보(良輔)인데 효력부위(効力副尉)며, 삼남은 양우(良佑)인데 문장과 행실이 저명하였다.

양필(良弼)은 호군(護軍)인 이여기(李汝起)의 다님에게 장가들어 一남 三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원호(元頀)요, 장녀는 민념(閔恬)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이침(李琛)에게 시집갔으며, 삼녀는 생원인 박창우(朴昌宇)에게 시집갔다.

양보(良輔)는 충의위(忠義衛)인 손병(孫昞)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四남 五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이호(以頀)와 시호(是頀)와 지호(之頀)와 유호(惟頀)이고, 장녀는 박명복(朴明復)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이정란(李廷蘭) 조길사(曺佶士)와 황극준(黃克俊)과 양시춘(揚時春)에게 시집갔다.

양우(良佑)는 정진업(鄭振業)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三남 三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취호(就頀)와 진호(進頀(이고, 장녀는 민돈(閔憞)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황정(黃鋌)과 박원규(朴元揆)에게 시집갔으며, 내외의 증손과 현손인 남녀가 무릇 백여인이다. 공은 장중(莊重)하고도 그 그릇됨의 헤아림에 있어 갈수록 깊었다. 이따금 사람들이 능히 헤아릴 수 없었던 것을 능히 헤아렸으며, 성품도 또한 재물은 소홀히 여기고 의(義)를 좋아하여 옛 열사(烈士)의 기풍이 있으셨다.

평소에 살면서 사람들과 접촉함은 매우 옳고 그름이 없었으나 내면은 실제로 강렬하고 과감(果敢)하니 향리에서 모두 사랑하며 공경하였고, 족당(族黨)은 적고 적어서 오직 호수공(湖叟公)이 오세조(五世祖)를 같이 하는 족친으로 서로 더불어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며 지친(至親:兄弟)과 차이가 없었으니, 호수공(湖叟公)은 즉 나의 선조(先祖)이시다. 공께서 일찍이 나의 선조(先祖:湖叟公)와 더불어 임진(壬辰:一五九二)의 일을 함께 하셨기 때문에 향리의 부노(父老)님이 전하여 칭송하던 나머지와 가정에서 터득한 것이 더욱 모두 자상하였으니 공의 기풍(氣風)을 듣고서 사모(思慕)함을 알았던 것도 마땅히 나와 같음이 없으리라. 아! 공과 같은 분은 가히 세상에 드문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평수길(平秀吉:倭將)은 섬나라 간특한 영웅으로 천하를 집어 삼키려는 뜻이 있어서 우리나라 보기를 어린 아이의 희롱함과 같이 하면서 정병(精兵) 四十만 대군으로 큰 바다를 날아 건너왔으니, 그 칼날을 어찌 가히 당하랴! 이 때를 당하여 이일(李鎰)과 신립(申砬)이 이름은 웅호(熊虎)의 장군이라고 하였고, 그가 거느린 자들도 역시 모두 한 때의 정병(精兵)을 선발하였으나 겨우 한 번 적을 보더니 한 발의 화살도 발사하지 못하고 패하였으며, 나머지 성의 망루에 남아 바람에 날리듯 궤멸하게 되었다. 어찌 족히 길을 찾으랴.

홀로 공은 평민으로서 분연히 일어나 외롭지만 과감하게 세찬 왜적을 항거하며 한 번 거사하여 적장(賊將)을 목 베고 적기(賊旗)를 빼앗았고, 두 번 거사(擧事)하여 온 성의 승리를 가져오니 十전 十승이라. 일찍이 한 번도 쓰러짐이 없었고, 군사를 일으킨 수년의 가운데 동강(東江) 좌측의 생령(生靈:백성)이 그를 힘입어 생업을 편안히 하였으니, 은연중(隱然中)에 국가를 재건하는 뿌리를 깔게하셨다. 가령 부월(斧鉞)을 잡고 곤성(閫鋮)을 전담하기를 권율(權慄)이나 이순신(李舜臣)의 제공(諸公)과 같이 하였더라면 그 공로와 훈업(勳業)을 어찌 가히 헤아릴 수 있으랴!

애석하구나! 윤국(潤國)과 박진(朴晋)이 공의 힘을 빌려 큰 명성을 얻었으나 공은 오히려 고을 원의 반열에 머뭇거리며 끝내 반듯한 벼슬도 얻지 못하였도다. 또한 불행하게도 북극성이 먼저 덜어지니 듯을 이루지 못하고 몸은 땅에 묻혔도다. 돌아가신 뒤에 추증(追贈)된 은전(恩典)이 또한 어찌 족히 그 공로의 만분의 일이나마 갚을 수 있겠는가!

공의 후손인 사건(思健)과 권(權) 등이 모두 문장과 학문이 있으니 나와 교유한 지가 오래이다. 하루는 박진(朴晋)의 임진(壬辰) 장계(將啓:啓草)에 그의 종조(從祖)이신 휘 이호(以頀)께서 지으신 가록(家錄)을 가지고서 보여주며 그 사실을 기록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만양(萬陽:내)이 간절히 공의 행적(行蹟)을 생각하건데 벌써 백여년이 된지라 그 때에 자료들이 이와 같이 흩어져 있었다. 만양(萬陽)이 이미 들은 바 또한 참고할만한 기록을 감히 참고하여 증명하여 그 줄거리를 이상과 같이 기록하여서 후세 사가의 기록을 준비하였노라.

참봉(參奉)인 정만양(鄭萬陽)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