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복성일기(永川復城日記)
지은이: 복제공 정담(鄭湛)
복제공 정담선생은 1552년 명종7년에 태어나셔서 1634년 인조 12년에 83세을 향유하셨으며, 과거에 합격하시고도 벼슬에 나가시지 않고 평생을 학문을 연구하신 선비로 임진왜란이 일자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의금부도사의 벼슬을 제수받았으며, 복제공의 시호를 받으셨습니다.
본문
임진(壬辰: 一五九二)년 四월에 왜적이 부산(釜山)과 동래(東萊)를 함락하고 첨사(僉使) 정발(鄭撥)과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을 죽이고 적이 동래로부터 세길로 나누어 나아갔다.
한 길은 양산(梁山) 밀양(密陽) 청도(淸道) 대구(大邱) 인동(仁同)을 거쳐 상주(尙州)에 도달하여 이일(李鎰)의 군사는 폐하고、한 길은 김해(金海)를 거쳐 성주(星州)와 무계현(茂溪縣)의 강을 건너 지례(知禮) 금산(金山 : 現 金泉)을 지나 충청도(忠淸道) 영동(永同)으로 나와 청주(淸州)를 함락하고 경기(京畿 : 서울)로 향하였다.
한 길은 장기(長鬐) 기장(機張)을 거쳐 좌병영(左兵營) 울산(蔚山) 경주(慶州) 영천(永川) 신령(新寧) 의흥(義興) 군위(軍威) 비안(比安)을 함락하고 용궁(龍宮) 하풍진(河豊津)을 건너 문경(聞慶)으로 나와 중로(中路)의 군사와 합세하여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로 들어가서 한양(漢陽)으로 향하니 깃발과 칼빛이 천리에 이어졌으며 혹 십리 혹 五 、六十리 거리에 포성이 들리고 위험한 지대마다 영책(營柵)을 시설하여 수비를 함에 밤이면 횃불로서 서로 연락하니 영남좌도(嶺南左道)의 한 길이 적이 영천(永川)을 요로(要路)로 하여 수만 병력을 주둔시키고 사방을 노략질하니 영남 일대의 백성들이 피해가 가장 심하였다.
이 때 영천의 유학(儒學) 정대임(鄭大任)이 충분 강개함을 참지 못하여 재종제 대인(大仁)과 더불어 남보다 앞서 의병(義兵)을 창기(倡起)하니 향중(鄉中) 의사(義士) 조희익(曺希益) 、조성(曺珹) 、신준용(辛俊龍) 、정천리(鄭千里) 、정석남(鄭석南) 、최인제(崔仁濟) 、김대해(金大海) 、김연(金演) 、이득용(李得龍) 、이번(李蕃) 、이영근(李榮根)등 六十여인이 소리치고 응함으로 나도 역시 적개지심이 분발하여 즉시 족제 대임의 진중에 가서 서로 도우려 의병을 모집하니 정병(精兵)이 수백인이었다.
五월 초에 대동(大洞)에서 적을 격파하고 정천리(鄭千里)를 시켜 좌병사(左兵使) 박진(朴晋)에게 보고하게 하니 박진이 크레 칭찬하여 즉시 복병장(伏兵將)으로 분부하니 휘하 선비 신준용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군관의 소임이 어지 서생(書生)인 정대임(鄭大任)에 적합라리요.』히니、이로부터 의병대장이지 또 어찌 복병장이란 칭호를 이용할손가.
대임이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고 적을 토벌하는데 남에게 굴함이 무엇이 욕될것인가.』하고、이번(李蕃)과 정천리(鄭千里)를 시켜 피란민을 수색하여 생명을 구하고 적을 토벌하도록 유인하니 감격설체(感激雪涕)① 하고 인심이 동요하여 十일동안에 九百여명이 모여드니 병사 박진이 의병이 많음을 시기하고 억제하기에 의병들이 임의대로 못하고 지사(志士)들도 실망하니 정대임(鄭大任) 、정담(鄭湛)이 족형(族兄) 세아(世雅)와 조희익(曺希益) 、곽회근(郭懷根)등과 더불어 초유영(招諭營)에 상서하니『초유사의 영대로 하겠다.』하니 초유사 김성일(金誠一 :鶴峯)이 장한 일을 칭송하고 제의장(諸義將)에 명령하기를 『각각 자기 군사를 통솔하여 그 절제를 엄숙히 하라.』하였다.
六월에 대임(大任)이 정천리(鄭千里)를 성황산에 참복시키고、이번(李蕃)은 봉천원(蓬川院)에 잠복시켜 왜적의 행태를 정탐하게 하니 조금 사이에 정천리가 뛰어와 말하기를 『적이 크게 온다.』하기에 즉시 이번과 조덕기(曺德騏)에 명령하여 군북면(郡北面) 요로처(要路處)에 잠복하여 대기토록 하였으나 이날은 운무(雲霧)가 가득하여 앞을 바라보지 못하였다.
七월초에 왜적 三百여명이 신령의 요로에 나타나 저물게 북습(北習)과 와촌(瓦村)등지에 분탕하므로 대임(大任)은 적의 갈 곳을 예측하여 당지산(唐指山)에 잠복 대기하였더니 이날 저녁에 적이 과연 이르기에 아군들이 二十명을 사살하고、四十명의 목을 베고 또 겁림원(迲林院)에 잠복하여 왕래하는 적을 철거하자 마침 어사라고 호칭한 왜적이 군위(軍威)로부터 신령(新寧)으로 빨리 달아났다.
七월 十四일에 박연(朴淵)에서 진격하자 때에 신령 의병장 권응수(權應銖)와 의흥 복병장 홍천뢰(洪川賚)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군응수 등과 합세 추격하여 四十여명의 목을 베고、창 검 우마 등속을 탈취한 것이 무수하자 나머지 적은 일부는 의흥(義興)방면으로 일부는 하양(河陽)방면으로 도주함에 군응수와 홍천뢰등은 의흥 방면으로 추적하여 소계(召溪)까지 가서 격멸하였다.
정대임(鄭大任)과 정담(鄭湛)등은 하양방면으로 추적하여 와촌까지 가서 격멸하니 이로써 아군들의 사기가 왕성하여 지자 적의 게력이 쇠약하여 지니 사람들의 의사가 강하여 적을 공격하자는 자 많아지니 적들이 감히 자행하여 노략질하지 못한지라、정대임이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여 말하기를 『적이 연속 채전하니 겁을 내어 태연하지 못하면 또 뒤에 연속 할 수 없을 것니니 이를 인하여 영천에 주둔할 적을 급히 공격하여 성을 탈환하자.』하고 어느날 성을 포위할 계획으로 막하의 군사를 보내 각 읍의 의병의 청원(請援)을 통고하였다.
二十三일에 군남 추평(楸枰)에서 전투를 하되、화공(火攻)의 준비로 군졸을 시켜 시초(柴草)②를 구해서 서북문 밖에 잠적(潛跡)하고 장목으로 사다리를 만들어 성을 넘는 도구를 준비하고 또 용사를 선출하여 군 서편 봉상에 올라 적의 숫자를 파악토록 하니、적이 말을 타고 성밖으로 달아나고 군데군데 개미와 벌떼 같음으로 숫자를 파악하지 못하자 이때에 권응수와 신령 현감 한척(韓倜)이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홍천뢰 역시 군졸을 거느리고 모여들었다.
二十四일에 하양 의병장 신해(申海)와 하양군수 조윤신(曺胤申) 、자인 의병장 최문병(崔文炳) 、경산 의병장 최대기(崔大期) 、경주 판관 박의장(朴毅長)등이 각각 군족을 인솔하여 모이니 총 三千五百六十여명이라.
의성(義城)감사졸(敢死卒)③ 五百여명이 왔기에 분부를 하니 문무(文武)용사가 수백 명이 권응수(權應銖)를 별장(別將)으로 하고 이때에 신해(申海)를 좌총(左總)으로 하고 최문병(崔文炳)을 우총(右總)으로 하고 、정대임(鄭大任)을 중총(中總)으로 하고、홍천뢰(洪天賚)를 선봉장(先鋒將)으로 하고、본(本) 군수(郡守)김윤국(金潤國)을 별장(別將)으로 하고、진사(進士) 정세아(鄭世雅)와 정담(鄭湛)을 찬획종사(贊획從事)로 하여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이란 깃발을 진중(陣中)에 세우니 진세(陣勢)가 엄숙한지라 따라서 기와 북을 준비하여 정대임(鄭大任)이 제장사(諸將士)에게 하령(下令)하기를 『차례대로 나아가 인사하라.』하고 말하기를 『지금 조정이 멀리 서수(西수)에 있으니 정령(政令)이 불통이라 이때에 군중법령을 엄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지난 날 적을 공격할 때는 혹시 군기에 위배되었으나 처음 당한 일이기에 용서하였지만 오늘날 성중에 주둔한 수많은 적을 우리 고군(孤軍)들이 전과 같이 하면 대사를 성취 못할 것이니 우리의 장졸들은 같이 약속하여 맹세하고、황급하여 난언자(亂言者)를 처참하고、적을 보고 오보(五步)이상 후퇴한 자도 처참하며、자유자행하여 장수의 명령을 불복종한 자도 처참하며、전투에 다달아 항오를 잃는 자도 처참한다.』하니 장사들이 다 응함에 군중에는 『다만 장군(將軍)의 명령을 복종할 것이지、감히 위반할 것이가.약속과 같다.』하였다.
또 제장(諸將)에게 말하기를 『군사는 정미로움이 위주이지 많음이 위주가 아니라 우리 숫자는 비록 적으나 죽을 마음을 갖고 있고、적의 숫자가 많으나 의사가 교만하니 나는 적들이 패망할 줄 안다. 다만 주둔한 성지(城地)가 뒤는 구릉이요、앞은 천야(川野)인 만큼 예전 제도로 굳게 수비하지 말고 유병(遊兵)④시킴이 좋을 듯하다. 여러 날 적정(賊情)이 태만함을 볼 때 바람을 따라 화공이 좋을 것이다.』하였다.
二十五일에 본 고을 앞들에 열진(列陣)을 할 때 적 수백 명이 남천(南天)에서 말을 목욕시키다가 아군이 오는 것을 보고 달아나 성중에 들어가니、성중에 있던 왜적이 치첩에 올라가서 아군들이 진전(陳前)에 기(旗)를 세운 것을 바라보고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활과 화살을 가지게 하여 진 앞 병사 사이에다 세워 둔지라 권응수(權應銖)、홍천뢰(洪天賚)는 기마병(騎馬兵) 五百을 인솔하여 적의 망견소(望見所)⑤에 치돌(馳突)⑥하고 정천리(鄭千里)에 명령하여 높은 봉에 올라 적의 응원병이 오는 것을 망견토록 하고、또 장사 四百여명을 선발하여 냇가 숲 속에 잠복시켜 급수(汲水)하는 적을 추격하도록 하니 적이 이로써 식수(食水)를 구하지 못하여 마른 곡식만 가지고 여러 날 곤란을 당하였다.
二十六일에 성에서 백보 정도 되는 냇가에 이르기에 요병(耀兵)⑦으로 치돌하니 북을 울리고 호각을 불며 왜장 二명이 금관을 쓰고 흑단의를 입고 명원루(明遠樓)⑧위에서 괴부채로 지휘하며 포로한 여인을 좌우에 두고 않았다가 조금 사이에 왜병 千여명이 성상에 올라 한꺼번에 철환(鐵丸)을 방사하니、우뢰 소리가 번개같고 성중에 남은 적들은 일시에 고성대호(高聲大呼)하니 산천이 진동하였다.또 우리말(國語)로 공갈(恐喝)⑨하기를 『너희들은 무슨 사람이기에 여러 날 해산도 않고、전투도 하지 않느냐. 한양도 벌써 함락되었고 팔도가 무너졌으니 너희들 약간의 군졸로서 어찌 우리를 당적하겠는가. 항복하여 신명을 보전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 너희들 장수의 목을 잘라 우리 기 아래 가지고 오리라.』하니、홍천뢰(洪天賚)는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라 분함을 참지 못하여 도전(挑戰)하려 하니 정대임(鄭大任)이 말하기를 『군사는 가벼히 발동할 수 없다.』하며 망동함을 삼가 칙군(勅軍) 한 자로 진중을 정숙하여 동요치 않도록 하고、피리불고 나팔 불어 태연한 기상을 보이니 적이 바라보고 더욱 태만한지라 이에 권응수가 말을 달려 흑단의(黑段衣)를 입은 왜장을 사살하니 성에 올라 있던 적이 성중으로 달려 들어 갔다가 포시(晡時)⑩에 적의 떼가 아군을 보고 빗발같이 조총(鳥銃)을 발사하여 아군 三명이 죽고、 어둡게 되자 적이 횃불을 들로 왕래하면서 모의하는 동태가 있었다.
경주 불국사에 있던 중이 포로가 되었다가 성중으로부터 온다 하기에 정담(鄭湛)이 불러 적의 실정을 물으니、 중의 말이 『내일 적들이 총합력하여 아군에 공격을 한다하기에 죽음을 무스고 도망왔음니다.』하니 정대임이 듣고 이날 밤 이경(二更)⑪에 군졸을 시켜 사다리로 성을 넘도록 동서문 밖에 대비시키고、또 명령하기를 『三차로 북을 울리고 각(角)을 불거든 여러 장사들은 신호에 따라 성중으로 들어가라.』하고、또 정천리(鄭千里)는 감사졸(敢死卒) 五百명을 인솔하여 마현산(馬峴山)에 잠복하였다가 내일은 이래 저래 하라고 시키고 권응수와 더불어 약속하기를 『적이 저희 문에 침범하면 내가 너를 죽이고、내 문에 침범하면 네가 나를 죽이라.』하여 권응수(權應銖)、신해(申海)、홍천뢰(洪天賚)、박의장(朴毅長)、한척(韓倜)、조윤신(曺胤申) 등은 군사를 인솔하여 서북문을 포위하고 정대임(鄭大任)、정담(鄭湛)、정세아(鄭世雅)、김윤국(金潤國)、최문병(崔文炳)、최대기(崔大期)、조희익(曺希益)、신준용(辛俊龍)、이번(李蕃)、조덕기(曺德騏) 등은 군사를 인솔하여 동남문을 포위하였다.
二十七일 아침에 북을 울리면서 성하(城下)에 이르러 남문을 먼저 공격하니 적병이 헤쳐지니 성상에서 총을 쏘면서 소리치기에 아군이 사다리를 갖고 방패를 지고 성을 넘을 동태를 보이니、왜장 수명이 은회(銀盔)⑫ 금단(金段) 면금포(面錦袍)를 입고 성문 누상에 앉아 부채로 지휘하면서 독촉하기를 『전 군졸은 성문을 열고 나가라.』하니 거절하다 아군의 군사가 소수임을 보고 짓밟으려 하는지라、우리 장사 수백인이 굳센 칼로써 그 중에 충돌하니 적의 부상자가 많았다.
조금 후에 적 기마병 수천명이 성중에서 총포를 발사 하기에 아군이 검을 내어 진군을 못하자 대임이 생사를 불구하고 여러 장수를 독촉하고 자신이 말을 달려 칼을 휘두르며 적진에서 좌충우돌하니、칼빛이 번개 같으니 적병들의 사상자가 추풍낙엽같이 되고 크게 문란하여 갈 곳을 몰라 서로 밟혀 죽어 시체가 삼[麻]과 같이 쓰러졌다. 아군이 용기를 얻어 진격하니 적이 칼에 당적치 못하고 성중으로 도주하니、왜장이 자기 군사가 패망함을 보고 성 아래로 뛰어 내리다가 대임의 칼에 목이 떨어지니 그가 왜장 법화(法化)였다.
제반 장졸들이 더욱 사기가 높아 남문을 공격하여 성중에 들어가니 적병이 더욱 요란한 지라、이에 권응수가 홍천뢰와 신해 등을 도우려 서북문을 방위하던 병사 五百명을 나누어 각자가 창검을 가지고 성 밖에 고루 방비하되 적이 성으로 넘어오는 것을 단절시키고 제군을 독촉하여 성을 넘어 가도록 하니 적제가 막강하여 성에 들어가기가 불리하였다. 권응전(權應銓)이 또한 경솔하게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니 권응수가 크게 노하여 그 앞에서 나아가지 않는 사람 몇 사람을 참살하여 사람마다 보이고 용감하게 서북문을 공파하도록 하고、자기는 먼저 파수병 十여명을 참살하니 적의 기병(騎兵) 천여명이 성중에서 나와 조총을 발사하기에 아군이 조금 후퇴하자 권응수가 용기를 내어 자신이 기를 휘두르고 말을 달려 활을 발사하니、백발백중 수십 명을 사살하고 용감하고 건강한 병졸을 시켜 죽은 적의 창자를 꺼내고 얼굴을 쫒아 적진에 던지니 적들이 황공 대노하여 갈 곳을 몰라 성중으로 들어 가기에 아군들이 사기가 높아 진격하니、이때에 정대임이 명령하여 북을 울려서 남북이 상응하고 수미(首尾)가 정제(整齊)되었기에 또 명령하기를 『三차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거든 동서 제장들은 좌우로 공격하라.』하니、수천 장졸들이 일시에 혹 성문을 파손하고 들어가고 혹 사다리로 성을 넘어 들어가 일시에 사방으로 북을 울리고 소리높여 들어가니 천지가 진동하고 화살과 돌이 빗발 같기에 아군의 세력이 더욱 강성하여 달리는 고래와 성낸 범과 같이 물밀 듯 하니、잠복하였던 적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상호간 격전할 때 때마침 서북풍이 불자 대기하던 정천리가 감사졸 五百명을 인솔하여 마현산에서 모래와 재를 날리니 진중과 성중이 아득하여 적이 총을 발사하지 못하고 다만 총통만으로 서로 부딪칠 뿐이였다.
아군이 돌격하여 三百여명의 적을 참살하니 적은 병기를 내버리고 관사와 창고에 숨을 때 정천리가 소리 높여 외치며 포로된 사람들은 빨리 나에게로 오라 지금 불을 지를 것이다 하니 포로된 남녀 앞다투어나오니 적의 사기가 좌절되어 구금을 못 하더라. 정천리와 감사졸 五百인이 사다리로 성을 넘고 바람을 따라 불을 놓으니 불은 뜨겁고 바람도 걷세고 성밖에 쌓은 나무에 불을 질러 난자하게 나오는 것을 성안까지 달구니 순식간에 연기와 불이 하늘에 차니 적도가 급급함이 불한 수풀 새같이 동암문으로부터 난자하게 나오거늘 대임(大任)과 담(湛)이 국졸을 거느리고 문 밖에 대기하다가 나오는 대로 六百여명을 처참하니、피가 흘러 내가 되고 남은 적은 도주하지 못하여 혹 명원루(明遠樓 : 朝陽閣)에 올라 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서북문 쪽에 있던 적이 성을 넘어 달아나려 하는 것을 권응수와 신해가 공격하니、궁축(窮蹙)⑬하여 적이 갈 곳을 몰라 서로 짓밟혀 죽은 자와 불에 타서 죽은 수는 가히 헤아리지 못하며、아군도 죽고 부상자 수가 또한 많았다.
남은 적 수십 명이 깊은 물에 뛰어 들기에 아군이 죽은 줄 알고 두었더니 물 속에 있다가 조금 뒤에 나와 언덕으로 올라 달아나니 권응평(權應平)이 칼을 들고 추격하였으나 이르지 못하여 돌아오니 탈출한 적 수십명이 경주로 도주하였다. 드디어 크게 이기니 화염은 밤중에도 중단없이 타고 피비린내가 수리(數理)에 냄새나고 해골 타는 것이 곳곳마다 구덩이에 찼다.
二十八일 아침에 식사를 하려고 북을 울려 점호를 하니 아군 사망자 수가 八十여명이고 부상자가 二三○여명이라. 적의 물건 소득은 말이 二百필이고、총통과 창검이 九百여 자루이고、안장과 채식 의복이 또한 많았다.
포로된 자를 검열하니 남녀가 千九十여명이라. 성명과 거주를 물어 배고픈 자는 밥을 주고 부상자는 치료하여 돌아가게 하니、갈 때 다 배례하고 말하기를 『생각조차 못한 오늘날 사생골육의 은혜가 있으니 생아자(生我者)는 부모이고 활아자(活我者)는 장군(將軍)이라. 장군의 은덕은 부모와 같으니 은혜를 갚고자 하면 호천망극(昊天罔極)이라.』하였고、이날 각 전투에 참살한 적과 온갖 물건을 탈취한 것을 본 군수 김윤국(金潤國)에게 위임 관리를 하였더니 윤국이 의진(義陳)에서 한 것을 자기가 한 것처럼 밤 사이에 좌병사 박진(朴晋)에게 보고하니 이 때 박진은 군졸을 거느리고 안동에서 두류(逗遛)⑭ 관망하다가 보고된 것을 자기공으로 하고자 하여 자기가 지휘한 것처럼 영천대첩의 공을 조정에 보고하니、이것을 인하여 박진이 사기를 얻어 영천에 달려와서 전투하였던 곳과 적을 토벌 하였던 것을 보고 크게 놀라고 탄식하기를 『예전에 한팽(韓彭)⑮이와 제갈량(諸葛亮)⑯이라도 이 이상 더할 수 없다.』하고 속으로는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八월 초에 박진이 권응수를 돌격장(突擊將)으로 삼아 직접 인솔하여 경주에 주둔한 적을 토벌하고 정대임과 나는 정예로운 기마병을 인솔하여 비안(比安) 용궁(龍宮)으로 진격하여 주둔한 적을 다 격파하고、十五일에 회군하여 하양(下揚) 자인(慈仁)에 흩어진 적을 격파하고 군사를 인솔하여 경주(慶州)에 도달하니 병사 박진이 도내의 군졸을 인솔하여 난처함을 해결치 못하여 안강으로 후퇴하여 두류 관망하다가 합세하였다.
八월 二十一일에 경주성을 포위하여 서문을 격파하니 적이 동남문으로 도주하기에、아군이 북을 울리며 성으로 들어가니 오시(午時)경에 적병이 다시 동남문에 이르니 성중이 진동하고 공포를 일으켜 박진의 군사가 먼저 붕괴되어 서문으로 탈출하니 정대임이 정벌하는 사졸에게 말하기를 『동남으로 도주하거든 서북을 방비하는 것이 예전 아부(亞夫)의 확고한 전술이라. 이제 대중의 실정이 와해되어 비록 견디지 못하나 만약 서문을 탈출하면 적에게 반드시 패망한다.』하고 즉시 나와 더불어 정병 수백명을 인솔하여 칼을 휘두르면서 말을 함께 달려 동문으로 탈출하여 분황사(焚篁寺)로 오다가 돌아보니、적병이 서천 숲 속에서 잠복하였다가 아군을 포위함에 박진이 먼저 붕괴되고 또 패전함에 영천의사 최인제(崔仁濟)、정석남(鄭碩男)、김대해(金大海)、김연(金演)、정의번(鄭宜藩)、이일장(李日將)、손현(孫晛) 등 수십 인이 죽고 박진(朴晋)은 권응수(權應銖)와 박의장(朴毅長) 등을 시켜 군졸을 점검하여 안강(安康)으로 돌아오자 이날에 정대임과 담이 박의장을 도우려 군사를 합세하여 밤에 성 아래 잠복하였다가 진천뢰(震天雷)를 발사하여 성중 적진에 떨어뜨리니 적이 무엇인지 몰라 주워 보다가 조금 뒤에 그 중에서 불이 붙어 폭발하니 천지가 진동하고 철편에 맞아 사망자가 三十여명이고 미중자(未中者)는 전패하였다가 조금 뒤에 일어나 놀라고 겁내면서 『이것이 전부 신력이라.』하고 이날 밤에 적이 군졸을 데리고 성을 포기하고 서생포(西生浦)로 도주하였다.
박진이 경주성에 곡식 만석을 수득하고 성을 회복하니 이후로부터 좌도 각 읍이 점차 수복되고、강좌 백성들이 안정이 되니 이것이 다 영천을 극복한 공이라. 이 점차 수복되고、강좌 백성들이 안정이 되니 이것이 다 영천을 극복한 공이라. 영천 복성하는 날 김윤국、박진이 기만하여 자기 공이라고 하고 조정에 보고하여 의병이 노력함은 모르고 관군만이 상직을 받았고、의병은 참여치 못하였으니 이것이 다 후세에 징비(懲毖)할 일이다. 복제공 정담(鄭湛) 지음